
크솔 분과 같은 제목, 같은 주제로 각각 글/일러스트 같이 작업했습니다.
THE HALLOWEEN NIGHTMARE
***
"계속해요. 잘 하고 있어요."
상담자가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기본적으로 공감이 깔려 있다. 내담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낸다. 자상한 말투, 살짝 앞으로 기울인 몸, 계속하라는 듯한 손짓, 그러면서도 부담을 주지 않는 시선은 내담자가 마음을 털어놓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요며칠 윌은 FBI 수사관 일도 내려놓고 이틀에 한 번 꼴로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악몽 때문이었다. 한두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지독한 꿈은 벌써 수일 째 계속됐다.
"시계도, 같이 잠든 개도, 문이 열려 있는 것도 확인했어요. 아직도 그게 꿈이 맞긴 한 건지 헷갈려요."
윌은 날이 갈수록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의심했다. 한니발은 꿈은 꿈에 불과하다고 윌을 안심시켰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꿈이라는 걸 강조했다.
"지난번과 같은 꿈이군요. 그 사람이 또 나왔나요?"
"느껴졌어요. 분명 느껴졌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본 것 같기도 하고, 접촉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누구나 이따금씩 렘 무긴장증을 겪어요. 렘 수면에 빠지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기는 거죠."
"내가 가위에 눌렸다는 건가요?'
한니발이 끄덕였다.
"수면마비를 겪으면 현실과 꿈을 구분하기 어려워져요. 머릿속을 헤집는 과정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거죠."
윌은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 가위 현상이라고 단정지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어젯밤, 땀에 흠뻑 젖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벽걸이 시계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잠든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발치에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강아지가 있었고, 열린 문틈으로 외풍이 들어왔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넘치는 현실감이 온몸을 에워쌌다.
"윌, 꿈은 당신이 만든 그림과 같아요. 결코 당신을 해치지 못해요."
윌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꿈이라고 되뇌어도 공포를 떨칠 수 없다. 꿈속의 남자. 그는 밀려오는 물처럼 다가와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킨다. 서슴없이 나를 만지고 헤집는다. 어제는 말을 걸었다. 말 몇 마디로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고 나의 불안을 즐긴다. 그곳에서 나는 도망칠 수도, 마음대로 깨어날 수도 없다. 그렇게 보낸 밤이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간다. 그 남자는 도통 내 꿈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윌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단순히 악몽이었다면 당신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면, 그 꿈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인가요?"
한니발이 태연하게 받았다. 그의 얼굴은 걱정보다는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메모지에 무언가를 휘갈기며 얘기를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예전엔 꿈을 따라 정처없이 떠돌곤 했어요. 깨어나면 숲이었고, 도로였고……, 몸이 고생했죠."
"지금은?"
"깨어나면 얌전히 침대예요.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발치에 개가 자고 있어요. 문도 잘 닫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달라요."
한니발이 메모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윌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발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목덜미를 문질렀다. 낮은 카라 사이로 훤히 보이는 목 언저리를 손바닥으로 가리더니, 한니발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며시 손을 내렸다. 멀리서 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나를 단단히 잡았어요."
한니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와 접촉했군요. 당신을 붙잡고, 그리고?"
"붙잡았다는 말은 불확실해요. 내 기억으로는 분명 나를 껴안았어요. 박사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
"계속해요."
"난 거부하지도 않았고,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얌전히 있었어요. 그런 나를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내려와 목을 깨물었어요."
윌은 한니발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목을 비스듬히 옆으로 꺾었다. 셔츠자락을 밑으로 내려 최대한 목덜미가 드러나게 만들고는 꿈에서 물렸던 자리를 가리켰다. 잇자국이 선명했다.
"아팠나요?"
"기억나지 않아요. 저항하지 않은 거 보면 아픈 건 아니었나 봐요. 튼, 한참을 목에 키스하고 떨어졌는데,"
한니발은 윌의 꿈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음에도 태연했다. 유심히 상처를 들여다 볼 뿐,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윌의 입술이 떨렸다. 마치 지난 밤으로 돌아간 것처럼 상처를 부여잡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가에 내 피가 묻어 있었어요."
*
PM 22 : 47. 차가 드문드문한 도로를 가로지른다. 울프트랩으로 향하는 길, 어둠에 젖은 구름처럼 머릿속을 당신으로 꽉 채운다. 윌, 당신이 보고 싶다. 당신을 알고 있을까. 이 그리움이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목자의 외침처럼 절실하다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튀어오른 갈증이 아니고, 특정한 시간대에 너울치는 동요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난 이래로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므로 오늘 밤도 당신을 만나러 간다.
PM 22 : 59. Trick or Treat. 아이들 목소리가 거리에 가득한 밤, 울프트랩은 평소보다 깜깜하고 조용하다. 인적 드문 곳에 사는 탓에 이곳까지 사탕을 찾아오는 이는 없다. 애초에 사탕이 있지도 않을 뿐더러 퇴근길에 잭으로부터 호박 젤리를 받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할로윈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요즘 내 감각은 날짜가 아닌 시간에 있다.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킨다. 지금 잠들면 대여섯 시간은 잘 수 있다. 물론 악몽이 없을 경우다. 꿈의 흔적이 종일 따라온다. 목덜미를 쓰다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같은 자리를 문지르고 문지르다가 끝내 눈을 감는다. 부디 아무 꿈도 꾸지 않기를 바라면서.
PM 23 : 49. 곤히 잠든 당신을 본다. 자면서도 목덜미에서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이 눈에 밟힌다. '종일 불편하긴 했구나' 보다 '제대로 흔적을 남겼구나' 하는 안도감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낮에 상담실에서 꿈을 묘사하던 당신이 참 귀여웠는데. 지금 이곳은 당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힘차게 굴러간다. 시계는 착실히 초침을 세우고, 발치에서는 윈스턴이 자고 있고, 문은 살짝 열려 있다. 당신의 감각이 의심하던 것들은 전부 현실이다.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 조금 시달렸다고 그새 야윈 뺨을 쓸어 본다. 감촉이 좋다.
AM 00 : 00. 지금 이 악몽이 수면마비라면, 나는 뺨에 닿는 감촉에서 '닿는다'를 느껴도 '따뜻하다' 따위를 느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느껴진다. 눈이 번쩍 떠진다. 시계가 정확히 자정을 가리킨다. 윈스턴의 보들보들한 꼬리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쌀쌀한 바람이 느껴진다. 불안이 덮쳐 온다. 또 시작이다. 생생한 무언가가 나를 집어삼킨다. 여태껏 시달렸던 꿈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감촉이 점차 고통으로 변한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덜미를 파고들고,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당긴다.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린다. 이미 몸은 꼼짝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살갗이 찢어지는 이 아픔이 진짜라면, 꿈속의 남자는 내 피를 먹고 있는 중이다. 나는 결코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타협을 시작한다. 꿈이다. 나는 아프지 않다. 이건 꿈이다.
AM 00 : 11. 이건 꿈이다. 당신은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닦아 주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온 탓일까, 윌이 자면서도 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떤다. 날이 날인 만큼 꽤 오래 물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십 분 남짓 지났을 뿐이다. 은연중에 상대가 윌이라는 것을 되뇌이며 봐줄 수 있는 만큼 봐줬다. 다른 이 같았다면 온몸의 피를 빨아들였으리라. 지혈되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윌이 신음과 비명이 뒤엉킨 알 수 없는 소리로 흐느낀다. 살고자 펄떡이는 모습이 만족스럽다. 아름답다. 단 한 번도 재물에게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오늘도 당신을 살린다.
할로윈, 죽은 자들과 그들을 피하려는 자들이 만나는 일 년의 한 번뿐인 기일. 산 자는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의 육체에 깃드는 것을 막기 위해 가면을 쓴다. 얼굴을 가리면 죽은 자는 산 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의 할로윈은 우스꽝스러운 축제로 변질되었지만, 인간의 피로 연명하는 한니발은 매해 할로윈을 기념일처럼 삼고 희생양을 엄선했다. 고이 잠든 재물의 목을 꺾어 피를 들이켰다. 그러면 다음 날 어김없이 체서피크의 뱀파이어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AM 01 : 00. 불안하지 않다. 나는 잡히지 않는다. 이대로 볼티모어로 돌아가면 다시 주립 병원의 정신과 상담의가 되어 곤히 잠들 것이다. 그리고 아침 알람을 듣기도 전에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기를 들게 될 것이다. 윌은 눈을 뜨자마자 나를 찾을 테니까.
AM 01 : 00. 희미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아직 꿈은 끝나지 않았다. 꿈속의 남자가 곁에 있다. 쓰러지는 감각을 마구 흔들어 깨운다. 머리가 깨질 것 같지만 곧장 효과가 나타난다. 플라즈마를 역으로 통과하는 빛처럼 서서히 주변을 비춘다. 얼굴의 형상이 드러나고, 입가의 피가 눈에 들어온다. 목을 물리지 않으려고 몸이 먼저 반응한다. 피하려 하지만 피해지지 않는다. 이토록 끔찍한데도 일어날 수 없다. 꿈속의 남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력함에 절망이 몰려온다. 차마 꿈속의 악마를 떨쳐내지 못하고, 이 순간 가장 생각나는 이름을 부르짖는다. 한니, 발. 한니발, 한니……, 발. 한니발.
AM 01 : 05. 기쁘다, 아름답다, 먹음직스럽다, 달콤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당신을 볼 때마다 밀려오는 감각은 이토록 긍정적이다. 당신은 언제나 그랬다. 방금까지도. 처음으로 윌이 약을 이겨내고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가 무척 작아 알아들을 수 없다. 입술이 움직이는 것으로 대충 유추해 보건대, 오늘만큼 윌이 예쁘게 군 적도 없었다.
AM 01 : 05. 검은 악으로 물든 핏구덩이에서 손을 뻗는다. 빛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줄 거라고 굳게 확신한다. 한니발. 꿈의 끝에는 항상 그가 있다. 오로지 한니발만이 나를 이 지독한 꿈에서 구해 줄 것이다. 나는 절대로 홀로 이겨낼 수 없고, 깨어날 수 없다. 구해 줄 당신이 절실하다. 지금 나는 당신이 무척 필요하다.
AM 01 : 21. 사슴이 나를 몇 번 부르짖다 잠들었다.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하마터면 입을 맞출 뻔했다. 피차 몇 시간 후에 헐레벌떡 나를 찾아올 게 분명하니, 심심한 사과를 담은 포옹은 그때 해 줘도 된다. 대신 피가 멎어 멍울진 목덜미에 키스한다. 이걸로 됐다. 당신을 알게 된 이래로, 아니, 한 평생 처음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흡혈이었다.
"윌, 그럼 이따 만나요. 잘 자요."